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양 전쟁 (문단 편집) === 일본군의 한계 === [[일본군]]은 [[일본 황실]] 회의록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듯, 스스로도 [[미국]]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임을 인지하고 있었고, [[계란으로 바위치기|미국을 이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 인정했고 당시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마저 미국과의 장기전은 무리이고 단기전으로 미 태평양 함대를 무너뜨린 뒤 하와이 점령, 파나마 운하를 장악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데리고 와 후퇴조건으로 수출 제한을 풀려고 하였지만, 정작 [[일본]]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미국이 생각보다 격앙된 모습을 보였고 함대를 긁어모으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승리하고 단 1년 만에 전시생산 체제를 완성해 쇼 미 더 머니를 보여주며 결국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신속해야 하며, 모든 것이 계획에서 크게 틀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의 대립은 너무 심했다]]'''. 물론 당대 거의 모든 [[군대]]에서 각 군간 대립은 있었다.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나치 독일]]도 비슷했던지 [[아돌프 히틀러]]의 수기에도 언급된다. [[독일 국방군|국방군]](Wehrmacht)과 [[슈츠슈타펠|SS]] 간의 갈등도 엄청나게 심각했고[* 여기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배경에서도 드러난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도 언급된다.], 국방군 내에서도 육해공군간의 대립이 있었다. 특히 항공모함을 가지려던 독일 해군은 항공모함에 편제 될 항공대 지휘권을 가지고 괴링이 독일에서 나는 것은 전부 자기 지휘권이라 주장하며 견제만 하는 바람에 항공모함을 건조 완성단계에 이르렀음에도 굴리지를 못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게 [[독일 해군]]의 [[에리히 레더]] 제독이 물러날 때 히틀러에게 "총통께 부탁드리는데, 해군의 적인 [[헤르만 괴링]]에게서 해군과 제 후임자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까지 했고[* [[카를 되니츠]] 제독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실화를 밝히면서, "타 군의 실패에 대한 부정확한 보고를 총통([[아돌프 히틀러]])에게 너무 서둘러 한다."며 [[헤르만 괴링]]을 비판했다.],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이나 [[공군 야전사단]] 같은 편제가 따로 존재하는 등 엉망인 면도 있었다. 일본의 적국이었던 연합국에도 이러한 면은 있었다. [[미 해군]]과 [[미 공군|미 육군항공대]]는 폭격의 우선 순위 문제로 갈등, 미 육군 출신인 더글라스 맥아더와 해군 출신 어니스트 킹이 필리핀-대만 진공루트 가지고 박터지게 싸운 적이 있고, [[영국 공군]]은 [[영국 해군]]과 해군항공대의 처우를 두고 갈등한 것처럼 타군과 경쟁과 자존심 싸움이 상당히 치열했던데다가, [[미군]]의 경우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가 상호간에 어깃장을 놓는 바람에 지원이 늦어져 애꿎은 [[미 해병대]]만 제대로 피를 보는 바람에 양측에 해병대가 이를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 정도가 매우 심각했다. '''[[죽창사건|서로 교전]]까지 [[밀리환초 학살사건|벌이려 한 적]]도 있을 정도로.''' 이 둘은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뒷감당을 못할 지경이라 교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거고, '''소규모 부대 간에는 정말로 총질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뿐만 아니라, 해군 조직 중 하나에 불과하던 연합함대조차 해군 본대와는 완전 따로 놀았을 정도로 [[일본군]]은 서로 손발도 하나 맞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일본 육군]]은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해 해전([[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의 그 중대한 결과조차 뒤늦게 [[일본 해군]]으로부터 통보받거나, 심지어 스스로 알아내야 했을 정도. 나중엔 육군이 자체적인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운용하는 비범함도 보여주었다. 이런 것은 영상매체에도 반영돼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도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 배우 [[와타나베 켄]]이 연기하였다.]이 나중에야 연합함대의 전멸을 소문으로 듣고 허탈해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의 포인트는 "같이 이오지마에 배치된 해군 지휘관들조차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긴 하다. 사사건건 육군의 작전에 딴지를 걸면서 앵무새처럼 연합함대의 지원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 해군 쿠리바야시 중장이 '''"해군은 모르고 있냐?"'''라고 묻는 장면이 백미. 이처럼 자신들이 완벽한 협력과 통제 아래 진행되어야 승기를 잡을 수 있을까말까한 어려운 작전을 눈 앞에 두고도, 일본군의 육해군은 서로 [[불협화음#s-1|불협화음]]이다 못해 서로 방해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을 피하려면 미국의 조건대로 [[중일전쟁]] 당시 얻은 영토를 포기, 철수하는 방법과[* [[미국]]은 [[일본]]에 [[석유]] 수출 규제를 먹이면서, 규제를 푸는 조건으로 "[[중국]] 및 [[만주]] 철수"를 내걸었다. 이는 [[헐 노트]]에도 나와 있다.] 미국과의 양면전선을 만들어버리는 가불기에 가까운 선택지만이 주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군 스스로도 "미국과 일본의 국력 차이는 명백하며,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전면전을 개시할 시 일본이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위에 언급된 황실회의록의 기록만 보아도 자명하다. 일본군은 정복전쟁에 이미 수많은 예산과 인력을 소모한 시점이라서 중국과 만주를 무혈로 내주기에도 불가능하여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일본군이 고민에 빠지다가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킨 뒤 필리핀을 먹고 브루나이 방면 원유지대를 차지하자' 라는 최악의 결론을 내놓으면서 미국과의 전쟁을 고르게 된다.[* 군부 내각들도 미국의 협박 한 방에 중국일대에서 철수하면 당연히 유족은 물론 일본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니 승리 가능성이 없는 도박이니 논외였으나 전쟁이라면 승리할 가능성이 적지만 대박만 터진다면 모든게 잘 돌아갈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는 도박이었으니 당연히 선택은 전쟁이었다.] [[미국]]이 전쟁에 참여는 안 해도 연합국과 함께 [[유럽]]에 최우선적인 역량을 쏟고 있고, 대부분의 물자가 유럽 방면으로 투입된다는 사실을 주목하였으며, 미국의 [[필리핀]] 점령에 대하여 [[동남아시아]]에서 [[반미]] 정서[* [[태국]]도 추축국에 가담한 근본적인 원인은 [[독재자]] [[쁠랙 피분송크람]]의 의지이지만, 송크람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연합국들의 식민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점령 등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와 미국 내에서도 탈식민지론이 대두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여 미 해군의 심각한 전력 공백 상태를 야기한다면 자신들이 유리한 협상 위치 정도는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진주만 공습|선전포고 전 기습공격]]의 문제로 [[반일]]감정에 불을 붙여, 결과적으로는 전쟁 수행 의지만 더 불태우게 만든 꼴이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도 [[미국]]은 어디까지나 '''참전국'''의 위치에서 유럽의 반인륜적인 집단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간 구원자의 입장이었는데,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느닷없이 자국 영토가 공격받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인]]들은 [[극대노]]하였고, 정치권 역시 만장일치에 가깝게 참전 결의안에 동의하면서,[* 어느 정도냐면 이전까지 전쟁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던 야당 포지션 공화당 파벌 의원들조차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전화를 걸어 전쟁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는 '''사실상의 충성 맹세'''를 했을 정도였다.] 일본의 계획이었던 "치명적인 공격을 통해 미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다"는 목표는 첫발부터 어긋나게 되었다. 만일 [[미 해군]]을 크게 약화시킨 뒤 지속적으로 미 해군의 전력을 소모시키고 [[필리핀]] 및 [[태평양]]의 패전 소식이 지속되면 미국의 정치적ㆍ경제적 상황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은 물론, 그렇다면 미국 내 여론도 "일본의 요구를 그만 들어주자"는 여론이 생겨, 미국은 점점 [[태평양]]에서 손을 떼고 유럽에만 올인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결과적으로 [[진주만공습]] 이후 [[미국]]이 전쟁 의지를 불태움으로써 오판이었으나, 진주만 이후에도 미국이 확실하게 공세로 돌아서는 [[미드웨이 해전]]까지 미국 내 태평양 전쟁에 대한 여론이 지속적으로 부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제대로 된 선전포고 등이 이루어진 것도 반드시 오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미국은 다시 본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 태평양 전쟁에서 구르는 해병대와 함께 찍은 다큐멘터리를 무료로 상영해야 할 정도로 전쟁 수행 의지가 갈수록 떨어져가고 있었다. 따라서 일단 [[미 해군]]을 섬멸하여 [[태평양]]에서 [[미국]]의 전력 공백을 야기한 뒤, [[점감요격작전]]으로 지속적인 미 해군의 피해를 강요하여 경제적ㆍ정치적으로 부담을 받고 있는 미국을 단기간 내에 협상 테이블로 끌고 나와 [[일본]]의 [[동남아시아]] 진출을 용인하게 하거나[* [[일본]]은 당시 [[석유]]와 [[고무]] 등 천연자원이 지나치게 부족했다.] 적어도 동남아 [[식민지]]들을 유지하는 댓가로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재개하게 만들려는 심산이었다.[* 1941년 11월 5일 자 [[일본 황실]] 회의록에서도 "휴전하면서 전쟁 이전 수준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석유 수출을 보장받을 방법."에 대하여 논의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미국 [[상부#s-1|상부]]의 입장에서 [[태평양]]은 사실상 미국의 앞마당이자 천연 방어 라인인데, 이 곳이 뚫렸다는 것은 언제든지 적국이 함부로 침공할 수도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미국이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지속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일본군]]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미국]]을 상대로 유리하게 전장을 끌고 갈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당장 [[진주만공습]]의 피해도 좀 과소평가되는 감이 있긴 해도, 이것이 장거리에서 항공모함의 함재기로만 이루어진 공습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고[* 미군 전함 전력을 일정기간 동안 공백으로 만들어버렸다. 살아남은 배들 대부분도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미국]]도 국채를 발행하고 [[무기대여법|렌드-리스 정책]]을 통해 빠른 전시경제체제로 돌입하고 있었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그 많은 양의 전력을 단기간에 보충하는 것은 어려웠으며, 어떻게든 일본 해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거나 지연을 시켜야 했다. 결국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긁어모은 전력으로 일본군의 항모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 총 4척을 지닌 항모기동부대 2개를 수장시킨 덕에 백중세로 바뀌었고, 이후 [[일본 해군]]의 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과달카날 전투]]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수세적인 작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엔터프라이즈(항공모함)|엔터프라이즈]]가 대활약을 하면서 태평양 전쟁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전설의 배가 된 화려한 이면에는, "진주만 공습 이후 여러 격전을 거치며 손상을 입은 미국의 항공모함들이 수리를 위해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믿을 만한 항공모함이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해서 얼마 되질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으며, 그 정도로 1943년까지는 미군도 고군분투를 거듭한 전역이다.] 일단 [[일본]] 입장에선 쓸데없이 [[포트모르즈비]]를 공략하느라 항공모함 2척 허비하지 말고, 괜히 폼 잡는다고 전함 뒤에 배치하지 말고, 항공모함 6척을 싹싹 긁어모은 뒤 초대형 전함 야마토, 무사시로 몸빵하면서 미드웨이 해전을 펼쳐 미국 항공모함 4척[* 산호해해전에서 침몰한 렉싱턴 포함이다.] 다 잡고, 무슨 수를 써서든 [[하와이]]에 최대한 가까운 곳에 함대기지를 지어서 하와이를 봉쇄하고 전함 주포든 함재기든 지상발진 폭격기든 싸그리 동원해서 진주만을 어떻게든 함락은 못 시켜도 무력화만 시키면, 만약 1942년 6월 시점에서 미국이 태평양에 보유하고 있던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파하는데 성공하면, 그 다음 미국 항공모함은 1943년 중반 이후나 되어야 나오니, 그 사이에는 거의 미 해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고립된 하와이를 두고 일본군이 태평양을 장악할 기회가 왔을 분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기엔 전위에서 몸빵 역할을 할 [[야마토]]와 [[무사시]]가 체급이 너무 커서 속도 등의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점과 속도가 느린데 연료는 무지막지하게 먹는 괴물인데 정작 운용국인 일본은 '''[[기름이 없다|연료(석유)가 부족해서]]'''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전함사상에 찌들어 있던 일본이 왜 괜히 야마토를 호텔로 운용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냥 답이 나온다. 하와이의 방어력이 엄청났던 건 맞지만, 결국 고정된 타겟이고 요새화된 섬을 굳이 공략하지 않고 고립만 시키면 된다는 전략은 이미 현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겪은 바가 있다. 그런 다음 그 선에서 미국이 '무리다' 싶어 강화해주면 하는 거고, 강화를 해 주지 않으면 일본 해군이 오매불망 바라오던 함대결전도 가능했을 것이다. 전략적으로 하와이가 고립된다면 제아무리 미국이라도 서태평양 진출이 불가능해서, 있는 전력 없는 전력 다 긁어서 진주만으로 왔을 것이다. 여기서 이겨내면 그 때는 아무리 미국이라도 강화론이 꽤나 대두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압도적 함대를 어떻게 이기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과 미국의 정규항모비율은 5대7[* 물론 성능 차이는 꽤 났다.]이었는데, 만약 미드웨이에서 일본항모는 다 살아남으면 9[* 미드웨이에서 침몰한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 +], 미국항모가 다 죽으면 5[* 미드웨이에서 살아남은 호넷, 엔터프라이즈 -]가 되므로, 비율이 뒤집힌다. 필리핀해 해전이 역사에서 일본에게 처참하게 끝난 것은 미드웨이에서 한번, 과달카날에서 또 한번 일본 함대의 허리가 꺾였던 걸 어거지로 복구했던 게 원인인데, 위에 말했듯이 일본이 다 이기는 이 IF에서는 일본 함대는 1944년이 되어도 여전히 미국보다 우세를 지킬 수 있다. 아무리 미국의 공업력이 압도적이라도 항공모함을 1년 안에 다 만들어낸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항공기 우세 상황 지원을 일본이 받는 하와이 근해에서의 정면결전이라면 미국이라도 이긴다고 단언 못 한다. 물론 이렇게 연전연승을 해도, 유럽전선의 상황 같은 것과 맞물려 있었으므로, 더 자세히 말하려면 길어지지만 하여간 원 역사만큼 속수무책으로 발리진 않았을 거란 말. 1942년이 미국 입장에서 사상 최대의 위기였던 건, 역사적으로 하와이가 함락될 가능성이 "있기라도 했던" 유일한 시기였다는 점 때문이다. 수송선과 달리 군함은 당장 발주한다고 해도 시간이 필요했고[*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1주일에 1척씩 진수했다고 하여]] '무슨 배 1척 만드는데 1주일이 걸렸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미국 정부]]의 주문 수량이 워낙 많아서 거의 동시에 건조되기 시작한 것이 1주일에 1척씩 진수되었다 보는 것이 옳다. [[리버티급 수송선|리버티선]]의 경우도 용골을 올리고 블록들을 조립하는데 4일이 걸린 것이지, 블록들의 생산에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당연히 1주일 내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어폐가 있는 말이다.], 당장의 전력차는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장의 주도권은 일본이 쥐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이성적이고 효율적이며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자만하지 않은 채 철두철미하게 작전했다면, 태평양 전쟁의 판도가 다르게 돌아갈 가능성 역시 존재하였다. 더군다나 태평양전쟁 개전 초기 [[미 해군]]의 [[F4F 와일드캣]]에 대항하는 [[A6M|제로센]]도 이 당시까진 미 해군기에 비해 일장일단이 있는 기체였으나[* 일본군 파일럿이 역량이 워낙 되었기 때문에 제로센이 주도권을 가져온 것도 있다. 일단 카탈로그 상으로는 제로센은 일본 군부의 독촉과 압박으로 조종사의 탈출 및 생존 등 안전을 경시한채 장갑을 얇게 해 스피드와 선회력은 와일드캣을 압도했으나 그 외의 화력/내구성/안전 등등은 와일드캣에게 카탈로그 스펙을 따지면 떨어졌고 미군 파일럿도 타치 위브의 협동 전술로 이길수 있었다.], 내구력이 좋은 와일드캣의 장점을 이용해 타치 중위가 내세운 2(와일드캣) : 1(제로센) 비율로 이용한 공략법이 통하면서 제로센의 압도적인 속도나 선회력도 통하지 않기 시작했고, 미군이 전투기 F6F 헬켓으로 학살하는 와중에도 신형기 개발을 늦게 시작했다. 거기다가 일본 해군은 전함세력이라도 건재하였던 반면 미 해군의 경우 비교적 구형의 [[펜실베이니아급 전함|펜실베니아급 전함]] USS 펜실베니아(BB-38)만이 진주만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테네시급 전함]] USS 테네시(BB-43), [[콜로라도급 전함]] USS 메릴랜드(BB-46) 및 [[네바다급 전함]] USS 네바다(BB-36)는 1942년까지 수리되어야 했고, 나머지 전함은 이미 미국이 완전히 승기를 굳힌 대전 후반에나 수리를 받고 동원되거나 그대로 폐기되어야 했다. 이처럼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여 공세가 꺾이고 [[과달카날 해전]]서 열세로 변해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이 완전히 미 해군에 의해 섬멸되기 전까지는 미 해군에 대하여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태평양 전쟁의 전개와 [[일본군]]의 실책 등을 모두 고려하니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내가 맛깔나게 따귀를 때리면 감동 먹고 협상하겠지?"]]''' 라는 일본의 안일한 방침은 그저 비웃음거리 정도로 여겨지지만, 당시 그 개념 자체는 "[[미국]]이 정신을 차리고 여러 지역을 점령한 뒤 병력을 증강하기 전에 한 번의 기습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줌으로써,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인 막대한 규모의 함대를 무력화하고, 증원되는 미국 함대를 각개격파하여, 태평양에 국한하면 [[일본 해군]]이 [[미 해군]]에 비해 지속적으로 전력상 우위에 서게 할 경우, 미국은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상당히 합리적인 수준의 대전략이었다. 당장 [[하와이]]가 먹히고 미 서부 해안까지 위협받았다면 [[미국]] 입장에서도 갑갑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일본]]이 [[하와이]]를 점령할 능력이 있었냐면, 사실 그럴 능력이 없었다. 당시 요새화된 하와이를 점령하기에 [[일본 해군]]의 보급선 유지능력도 안 되었고, [[일본 육군]]의 상륙능력 역시 모자랐다. 그렇기에 애초에 하와이 침공을 주장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중장과 [[야마구치 다몬]] 소장의 주장은 황실회의에서도 묵살당하였고, 그럴 만한 구체적인 계획도 안 세워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하와이의 요새화 수준과 방어력은 그야말로 개사기적인 수준으로, 만약 [[미사일]]의 존재를 배제한다면 '''2010년의 [[미 해군]]도 48시간 내의 점령을 장담 못한다'''.] 물론 일본군이 굳이 하와이를 점령할 필요도 없이, [[미 해군]]이 수세에서도 분전으로 [[미드웨이 해전|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꾼 전투]]에서 승리하여 미국 국내의 전쟁여론을 반전시키지 못하였다면 일본군이 이루려고 했던 부분이 일정 부분은 정말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이 만약 자신의 전력을 100% 완벽하게 효율적으로 굴릴 역량이 되었다면 미군이 이기기는 할 수 있어도, [[1945년]]까지 100% 무릎 꿇린다고 호언장담하기는 힘들었다. 일본이 엄청나게 막강하거나 무서웠던 것은 절대 아니나, 당시의 그들은 분명 미 해군을 '''[[태평양]]에서 위협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해군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태평양이라는 대양을 사이에 끼고 싸우기에 일본이 공격하기 힘든 만큼 미국도 공격하기가 힘들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이오지마 전투]]로, 방어군의 지휘관이 잘 대처하자 무려 다섯 배나 되었던 미군도 제법 고전했을 정도로 상당히 진땀을 뺐던 바가 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군]]이 고전했다는 말은 어폐가 조금 있다. 사령관 이하 전 [[일본군]]이 전원 옥쇄를 결단했던 만큼 생각보다 훨씬 큰 피해가 나기는 했지만, 전투 자체는 전투 계획에 맞게 착실하게 일정대로 진행됐다. 그리고 방탄복의 부재와 후송 능력의 한계로 '사상자'가 일본과 비슷했던 것이지, 실제로 전사한 인원수는 '''전원이 전사한 일본'''보다는 미국이 훨씬 덜 발생했다. 대부분의 전투가 보병전으로 전개되던 태평양전쟁 전투의 특성상 전원 자결을 결단, 조직적인 저항을 한 것치고는 미군에 생각보다 많은 사상자를 안겨줬다 뿐이지, 전투의 계획을 틀어지게 할 정도로 일본군이 미군을 고전시켰다고 하긴 어려웠다. 미국의 고전이라고 평가받는 원인의 가장 큰 이유는 처음부터 미군은 여기를 3일이면 함락시킬 수 있다고 쉽게 생각했다가 한달이나 끌린 것과, 속된말로 그냥 내다버리다시피하는 일본군의 인명경시와는 달리 [[타라와 전투]]에서 3,7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는 이유로 사령관이 청문회까지 소환될 정도로 비싼 미국인 장병을 무려 7,000명이나 잃어 장사를 치른 인명손실 때문이다.] 엄연한 열강이었고[* 육군의 경우 [[미국]], [[영국]], [[소련]] 같은 연합군의 암묵적 묵인이 있었다면 [[중국]] 본토의 절반을 실질적으로 점령했을 것이고, 해군 역시 실질적인 전투력을 고려하면 사실상 영국보다 높은, 미국 다음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패권국이자 쟁패일로를 달리던 강국으로, 분명 '''머리만 좀 있었으면''' 미군과의 전쟁을 [[졌잘싸]]로는 끝낼 역량이 되었다. 일본군은 개전 초기까지만 해도,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웃음거리로서의 일본군이 아닌 명백한 태평양에서 [[미국]]과 연합군에 대한 현존하는 위협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일본군의 이미지 중 잔인성을 제외[* [[일본군]]은 개전 초부터 [[나치 독일]] 저리가라 할 정도로 상당히 폭력적이고 잔인한 군대였다. 애시당초 나치와 마찬가지로 [[우생학]]을 맹목적으로 믿던 인간들이라 다른 민족은 [[노예]]로서 지배하거나 절멸시켜야 할 동물로밖에 여기지 않고 있었다.]하면 멍청하고 [[무능]]하며 전근대적인 정신론만 고집하는 일본군의 이미지는 미국의 전쟁수행의지에 대한 오판과 이후 [[미 해군]]의 결사항전 등으로 인하여 [[자기 실현적 예언|자신들이 장기전이 되면 질 것이라 예상하였던 전쟁이 장기화되어]] 막장이 되면서 결국 그렇게 몰락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일본군]]은 작은 오차도 허용하기 어려운 전쟁을 벌이고는 자신들의 손발도 매번 엇박자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20세기 이후 항상 세계 최대의 패권국가의 자리를 놓은 적이 없는 국가]]를 상대로, 적인 [[미 해군]]의 분전으로 원하던 목표들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금수조치 및 [[일본]] 자체의 경제력의 한계로 인하여 그에 [[플랜B#s-2|대처할 계획]]조차 없었기에, 그 한계로 인하여 전쟁이 자신들의 계획에서 틀어지자마자 스스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